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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 [Carl Friedrich Gauss]

by seou11er 2023. 4. 26.

생애

1777년 독일에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말보다 계산을 먼저 할 수 있을 정도로 천재였다. 영주에게도 천재로 인정받아 그 지원을 받아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30세까지도 연구할 수 있던 것 또한 영주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1807년에는 괴팅겐대학의 교수로 발탁이 되었고 1855년에 79세로 사망할 때 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그의 인생은 학문 연구 속에서 평탄해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당시의 전쟁으로 세금은 높은 편이었고, 대학의 교수의 월급은 높은 편이 아니었다. 또한 교수로서 강의도 해야 했기 때문에 순수연구로만 쓰는 시간은 부족했다. 그의 공책에는 이럴 바에는 죽는 게 낫겠다는 내용의 글이 쓰여있기도 할 정도였다. 이런 팍팍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수론, 초기하급수론, 복소함수 등에 연구하여 그 발전에 기여하였다. 1809년에는 랄랑드 상을 받고 1838년에는 코플리 메달을 받기도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리만 적분의 그 리만이 바로 가우스의 제자이다.

등차수열의 합

가우스가 초등학생 때 선생님이 낸 문제를 푼 일화는 유명하다. 학교 선생님은 1부터 100까지의 숫자를 모두 더하면 얼마인지에 대한 문제를 내었다. 같은 반 다른 친구들을 1부터 차례차례 하나씩 다 더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우스는 순식간에 이 문제를 풀고 놀다가 선생님께 핀잔을 들었다. 가우스가 문제를 푼 방법에 관해 설명하자 선생님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천재성이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등차수열의 합 공식으로 순식간에 풀어낸 것인데 이 방법은 그가 처음으로 생각해낸 것은 아니지만 초등학생이던 그의 나이를 생각하고 다시 본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대수학의 기본 정리

수학에서 기본 정리라는 이름이 붙은 정리는 몇 개밖에 없다. 대수학의 기본 정리란 복소수를 계수로 갖는 1차 이상의 다항식은 반드시 복소수근을 갖는다는 것이다. 임의의 복소수가 모두 해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 복소수근의 존재성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는 정리이다. 이러한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증명한 사람이 가우스이다. 이를 증명한 사람이 가우스 한명으로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증명이 가지고 있는 의문을 모두 수학적으로 반박하여 증명하고 이를 논문으로 인정받은 것은 가우스이다. 그래서 보통 대수학의 기본 정리는 가우스가 증명한 것으로 치부한다. 엄밀하게 현대 수학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기하학적인 면을 강조하며 증명한 가우스의 증명 방법도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업적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 십 칠각형 작도의 증명

가우스는 19세 때, 정 17각형이 작도할 수 있는 다각형임을 증명하였다. 실제로 작도를 한 것은 아니고 작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여기서 작도란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가지고 도형을 그리는 것이다. 정 십 칠각형의 한 내각은 약 158.8도이다. 

그 외 

직접 그의 이름을 붙인 정리나 용어들도 많다. 다들 가우스 함수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닥함수라고도 하는데 어떤 수보다 작은 정수 중 가장 큰 정수를 출력하는 함수를 가우스함수라고 한다. 대수에서 가우스 소거법에 대해서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연립 1차 방정식의 기본적인 해를 구하는 방법의 하나다. 미지수를 하나씩 소거해가서 어떤 미지수를 정한 뒤 반대로 대입해가면서 나머지 미지수를 구하는 방법이다. 가우스 정수, 가우스 소수도 있다. 


업적에 비해 그는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벨과 갈루아에 관한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천재라고 불리는 아벨과 갈루아는 그 당시에 갈루아는 자신들의 이론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가우스에게 논문을 보냈지만 가우스는 그 당시 너무 많은 양의 논문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 그 당시 아벨은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이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다. 아벨이 죽은 뒤에야 가우스는 그의 논문을 확인했고, 그의 논문을 그가 살아있을 때 확인 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갈루아의 논문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이후에는 논문을 전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고 한다.